0 이하의 날들

🔖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는 제발트라는 사람이 아니라 제발트에 끌리는 사람들이 궁금했다. 더 정확히 말해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왜 제발트에 열광하는지 알고 싶었다. 왜냐하면 제발트를 특별히 애호하는 사람들에게서 일종의 공통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공통점이란 거칠게 말해 '문학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문학적이라는 것은 문학과 다르다. 그러니 문학적인 인간들 또한 문학인과 다르며, 차라리 특정한 세계관을 공유하는 특정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문학 주위에 둘러앉아 문학적 아우라를 소비하며, 그 아우라에 의지해 세계를 해석하며, 그에 관한 담론을 만들어내는 사람들. 그들이 갖는 특정한 세계관은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종말 후의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갖는 최소한의 윤리'로 요약할 수 있다.

(...)

이 느낌은 제발트 특유의 억제된, 금욕주의적 서술 태도와 맞물려 독특한 아우라를 발생시킨다. 문제는 이런 측면 때문에 애초 제발트가 의도했던 성찰과 애도의 글쓰기가 정반대로 세련된 스타일리스트의 글쓰기, 즉 극도의 회의주의를 스타일로서 취하는 탁월하게 심미적인 에세이로 귀결되고 만다는 것이다. (...) 그 결과 제발트의 글이 전해주는 과거는 현실과 꿈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게 되고 그것이 제발트의 글에 특유의 환각적인 분위기를 부여한다. 이따금 예기치 않게 결정적 파국의 장면 앞에서 여행이 중단될 때마다 그 환각적인 분위기는 절제된 슬픔과 합쳐져 일종의 명상에 가까운 치유적인 효과를 발생시킨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제발트의 글이 갖는 윤리에 의혹을 갖게 되었다. 그의 글은 윤리적이기에는 지나치게 아름답고, 치유적이다.

그런데 왜 하필 윤리인가? 왜 우리는 문학에 대해 말할 때 윤리를 말하는가? 흥미롭게도 그것은 문학의 위기에 대해서 말할 때다. (...) 문학 시장은 대중문학 시장과 자신의 가장 큰 차별점으로 윤리를 꼽는다. 한마디로 그 모호하기 짝이 없는 윤리성의 존재 여부를 통해 다른 하찮은 대중소설과 진지한 문학작품을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 나는 윤리가 문학에 있어 일종의 알리바이로 쓰인다는 의혹을 갖게 되었다. 다시 말해, 문학계 사람들이 제발트의 글에서 요즘 시대에 흔치 않은 진정한 문학의 흔적을 보면서 열광하는 이유는 거기에서 문학이라는 사멸해가는 한 시장의 존립 근거를 발견했기 때문이 아닌가?

(...)

다시 제발트의 글로 돌아와서, <토성의 고리>에서 주장하는 문학적인 윤리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것은 잊힌 것들을 애도하는 것이다. 파국의 풍경에서 통증을 느끼고, 결국 여행의 끝에 진짜로 몸에 마비를 일으키는, 신음하는 마음이다. 그러니까 이 윤리라는 것은 일종의 마취제다. 마비시키고 중단시키는 윤리다. 제발트의 글이 소설과 에세이, 허구와 비허구 사이에 어정쩡하게 끼여 있는 글더미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도 그것이다. 그의 글이 가진 강한 문학적 윤리가 무언가 되기를, 어딘가 가기를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무언가를 이루려는 인간의 광기가 낳은 것은 폭력이며, 폭력의 반복 속에서 우리가 도착한 곳은 폐허의 세계다. 그것을 잊지 않으려는, 그것을 막으려는 의지는 자연스럽게 극단적인 회의주의에 도달하게 된다. 사실 이것은 2차대전 이후의 모든 지적/예술적 운동의 중심에 놓여 있는 회의주의다. 모든 인간적인 것에 대한 절대적인 회의가 해체와 거부를 거쳐 마비로, 그러니까 완벽한 교착 상태로 귀결되는 것은 일견 논리적이다. 그러니까 아무 데도 갈 수 없다. 그런데 미탄에 빠져 아무 데도 갈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마음을 윤리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한가? 그건 회의주의를 가져온 원인 세계를 망각한 채 회의주의 말고는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된, 일종의 종교가 아닌가? 혹은 '최소한의 윤리'를 주장하는 스스로와 사랑에 빠지는 나르시시즘이 아닌가? 만약 이것을 윤리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 윤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문학뿐이다. 아무것도 만들지 못하고 아무 데도 이르지 못하며, 고장난 기계처럼 문학만을 반복 호명하는 윤리. 그것은 문학을 제외한 모든 것을 불신하는,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불신을 문학에 대한 오타쿠적인 열광으로 전도하는, 지극히 자폐적인 세계관이다.

공허감을 잊기 위해 여행을 떠났는데 결국 비탄 속에서 온몸이 마비되고 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우울하고 섬세한 여행자에게 작은 기쁨을 안겨줄 정도로 괜찮은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비된 채 앉아 있기에는 너무 많은, 더 나쁜 날들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 우리의 문명을 부서져나간 달의 잔해로 보기에는 너무 이르다. 달은 아직도 부서지는 중이니까.


🔖 자연주의와 부자연스러움

결국 리얼리즘, 사실주의, 자연주의 등으로 칭해지는 근대소설의 사조들은 현실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기보다는 현실이 무엇인가에 대한 작가들의 일련의 관점과 논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실에 대한 일련의 잘 구성된 논평들은 과연 우리의 현실에 대해서 무얼 말해주는가? 그것은 자신이 현실이라 여기는 그 세계관에 대한 순응은 아닌가? 현실을 담아내는 행위를 통해서, 현실 너머를 지향하는 열망을 담아낼 수는 없는가? 현실은 고정된 것이 아니며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는 미래를 향해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다. 바로 이런 현실의 모순적인 측면을 어떻게 포착할 것인가? 나는 <목로주점>에서 그 답을 얻지 못했다. 아마도 이것은 내 안에서 언제나 계속될 질문이며, 영원히 해결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 [인용_지젝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우리는 "어떻게 이 일상의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가?"라고 묻지 말고 차라리 "이 일상의 현실이 과연 그토록 확고하게 실존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어떻게 본체적 타자-사물에 조응했음을 확신할 수 있는가?"라고 물어서는 안 되고 차라리 "이 타자-사물은 우리에게 명령을 퍼부으며 진정 저 바깥에 서 있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순진한' 사람은 우리가 일상의 현실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일상의 현실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 존재론적으로 완벽한 자족적 전체로 여기는 사람이야말로 '순진한' 사람이다.


🔖 이 악순환을 멈추기 위한 근본적인 해법은 노동을, 그리고 예술을 자본에서 해방하는 것이다. 개인의 성취를 성과급에서, 개인의 열정을 잔업수당에서 빼내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들의 내밀한 창작 욕구를 1미터 단위로 잘라 팔지 않을 수 있게 해야 한다. 물론 이런 것들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약탈적 경쟁에 너무나도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그런 식의 경쟁 없이도 더 나은 삶은 가능하다는 것을 설득해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자본의 채찍질 없이도 기술의 발전은 가능하며 아름다운 시는 쓰일 수 있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다는 믿음, 그런 믿음이 단지 믿음이 아니라 상식인 사회가 가능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설득해내야 한다. 그것은 고되고 지난한 작업일 것이다. 그런데 이 스케치에 불과한 비전을 어떻게 구체화할 수 있는가 하는 고민을 우리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은 어쩌면 문학과는 별 상관이 없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 하여 이것은 그저 지금 내가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가 속한 지금의 이 세계, 따라서 문학이 가만히 들여다봐야 하는 세계. 여기는 대체 어떤 세계이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다시 말해, 무엇을 써야 하는가?


🔖 지난 몇년간의 여행을 통해 나는 교양 있는 시민에게 어울리는 교양 있는 태도를 익혔다. 명화들을 보며 배운 것은 그림이 아닌 것들을 그림 보듯 관람하는 법이었다. 슬럼가에서 길을 잃었던 몇 번의 경험은 오직 심미적 충격으로 남아 있다. 매끈한 스포츠카 차창 뒤에 숨어 외곽지역의 가난을 훔쳐보았다. 대형 오가닉 슈퍼마켓 체인점은 모험으로 가득 찬 산책로였다. 돌아와 여행자의 눈으로 바라본 한국은 키치한 아름다움을 가진 흥미로운 나라였다. 가난한 거리를 걸을 때 내 마음을 낫으로 찍는 듯하던 고통은 사라져 있다. 나는 고통을 심미적인 방식으로 승화할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나는 이제 괴로움 없이 하모니 코린의 영화를 볼 수 있다. 개 같은 기분이다.


🔖 우디 앨런에 반대한다

사실 그의 세계관은 <애니 홀> 같은 귀여운 영화들보다 삶의 비참과 불가능한 환상을 교차시키는 <카이로의 붉은 장미> 같은 영화에 더 잘 나타나 있는 것 같다. 그는 세계의 무의미를 믿고 그래서 환상을 옹호한다. 하지만 언제나 가장 인상적인 것은 현실과 환상을 오락가락하는 미쳐가면서도 절대 삶을 놓지 않는 인물들, 그들이 보여주는 엄청난 생명력이다.

실제로 한 인터뷰에서 우디 앨런은 죽음에 반대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블루 재스민>은 그런 우디 앨런의 세계관을 탁월하게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 그의 옛날 영화들을 돌려 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블루 재스민>은 의미값이 0인 영화라고. 그리고 나는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끊임없이 삶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었고, 나는 도무지 그 의견에 동의할 수 없었다. 나는 삶이란 '뭔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게 <블루 재스민>에는 완벽하게 결여되어 있었다. 대신 심술궂은 야유와 비정상적인 생명력이 넘쳐흐른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강한 생명력을 갖고 있지만 거기엔 아무런 의미도 방향성도 없다. 그저 과도하게 살아 있다. 마치 암세포들 같다. 아니 실수로 죽음이 프로그래밍되지 못한 생명체. 참으로 미국적인, 아니 현대적인 세계관이다.

이제 한국도 노령사회로 접어들고 있어서 그런지 생명력 넘치는, 화려하게 빛나는 노인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들의 성공적인 생존을 찬양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 젊어서 그런지 늙으면 죽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삶에 대한 지나친 욕망과 죽음에 대한 과도한 반대야말로 삶과 죽음의 본질적 무의미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태도가 아닐까? 그리고 그런 태도가 후쿠시마 원전 사고 같은 대참사를 낳는 게 아니냐고 했다가 우디 앨런 찬성파 친구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그녀는 <블루 재스민>이 우월한 영화라고 주장했고 나는 <블루 재스민>은 틀렸다고 맞섰다.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의견 일치도 없었다. 그런데 메시지 창을 닫고 나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와 같은 부류의 살마들이 우디 앨런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일생을 바치는 동안, 그녀와 같은 종류의 사람들이 그런 행위의 부질없음을 설파하는 우월한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 우리는 다시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려 들 것이고, 그러면 다시 그들은...... 음, 나쁘지 않은 것 같다.


🔖 도시에서 사람들은 뛰지 않는다

이렇게 도시적인 경험이 불가능해지거나 흔치 않은 특권이 된 상황에서, 도시에 대해 사유하는 것은 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지난 시기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도시를 찬미한 이유는 그것이 가진 해방적인 측면 때문이다. 도시의 익명성, 뒷골목과 샛길이 그것을 상징한다. 도시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하지 않는 장소들이 끊임없이 재발견된다. 왜냐하면 도시는 늘 사람들로 가득하고, 거리는 자주 바뀌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각지대 없는 cctv의 감시와, 영원히 지속되는 러시아워와, 감당할 수 없는 주거 비용과, 병원이나 감옥처럼 통제되는 시설들로 이루어진 최근의 도시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같은 것을 기대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이 도시는 여전히 그 도시인가? 아니라면, 이것은 대체 무엇인가? 우리가 도시 안에서 숨거나 도망칠 권리를 완전히 빼앗겨버렸다면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 도시 안에서 우리는 끝없이 이동하지만, 더이상 자유롭게 걷거나 뛰지 못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이동 상태 속에 갇혀 있다. 한때 찬미된 움직임은 이렇게 아이러니가 되어 돌아왔다.


🔖 젊음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인 이유는 그 시기에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답기 때문이다. 일종의 면제 상태, 무죄의 시기. 젊은 시절의 자유란 그런 것이다. 그것은 한 개인의 통제 밖에 놓인 행운이다. 하지만 그런 선물 같은 자유만이 자유인 걸까? 반대로 긴 시간을 통해서, 사회적 속박과 개인의 일차원적 욕망에 함몰되지 않기 위한 노력을 통해 실현 가능한 자유가 존재하며, 그것이야말로 가치 있는 자유가 아닐까? 그렇다면 자유야말로 노인의 덕목이자 성숙의 지표일지도 모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젊다는 사실이 좋았다. 내 반짝거리는 젊음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목에 두르려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젊음에 큰 관심이 없다. 물론 이렇게 말하기에 나는 여전히 너무 젊으며 또 오만한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내가 더이상 젊음에 지나치게 몰두하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든다. 그동안 나는 젊음이라는 한 종류의 자유에 지나치게 속박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것이 언젠가 사라질 것을 슬퍼하고 또 두려워했다. 하지만 사실 그럴 필요가 없다. 다른 종류의 자유를 찾으면 되니까.


🔖 다시 말하지만 예술에 관한 순수주의적 입장은 예술에 대한 여러 입장 중 하나에 불고하다. 위대한 예술이 탄생하는 수많은 배경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바흐는 왕과 교회를 위해서 작곡했다. 발자끄와 도스또옙스끼는 빚을 갚기 위해 썼다. 쏘비에뜨 연방에서는 명백히 정치적인 목적으로 위대한 영화가 만들어졌고, 반대로 미국에서는 명백히 상업적 목적으로 위대한 영화가 만들어졌다. 물론 내가 예술가의 내밀한 예술혼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나는 위대한 예술이란 예술가의 내밀한 예술혼과 예술가가 처한 현실 상황 사이의 긴장에서 촉발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초월적 욕망과 세속적 욕망의 경계에 위치한다. 예술이란 미학과 정치, 아름다움과 윤리,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과 시대를 초월한 예술을 만들어내고 싶은 욕망 사이의 투쟁의 장에 다름 아니다. 이 양립 불가능한 모순적 욕망과 상황 간의 투쟁을, 적대를, 긴장을 소거해버린 예술이 도착하게 되는 곳은 아마추어들의 소박한 자기위안이나 무미건조한 관제예술 혹은 세련된 문화상품의 세계다. 앞에 적은 예들이 단지 그렇고 그런 국가나 자본의 꼭두각시 혹은 왕이나 교회의 선전물의 세계에서 위대한 예술의 세계로 도약한 것은 바로 예술가가 가진 현실적 제약조건과 본인의 예술적 야망 사이에서의 치열한 고민과 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예술은 다른 모든 것에 대한 미적인 것의 무한한 승리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미적인 것과 다른 것들 사이에서 벌어진 처절한 투쟁의 실패의 기록에 가깝다. 그리고 예술은 그 실패를 발판 삼아 자신의 가능성의 범위를 확장해나간다. 그것이 우리가 예술의 역사에서 발견하게 되는 유일한 진리다.